서울 한복판 종로에 자리한 세운상가는 한때 ‘전자제품의 메카’라 불리던 곳이었다. 요즘은 고층 빌딩들 사이에 묻혀 그 빛이 다소 바랜 듯 보이지만, 이곳엔 여전히 시간을 거슬러 살아가는 이들이 있다. 그중 한 사람, 세운상가 2층에서 40년째 전자제품 수리를 해온 김영수 사장을 만났다.
김 사장님은 1984년, 20대 후반이던 시절 처음 이 자리에 가게를 열었다고 한다. 그는 “처음에는 라디오 고치는 것부터 시작했죠. 하루에 한두 대 고치면 다행이던 시절이었어요.”라며 웃었다. 이 공간은 2평 남짓한 작은 수리점이지만, 그의 손을 거쳐 되살아난 제품들은 수천 개에 이른다.
수리보다는 '사람'을 상대하는 일
김영수 사장은 수리 기술도 중요하지만, 결국 "사람 마음을 읽는 일"이 더 중요하다고 말한다. “누군가 라디오를 들고 왔을 때 그게 단순한 기계가 아니라
추억이나 그 사람의 삶의 일부일 수 있어요.
그래서 함부로 못 다뤄요. 그냥 ‘이건 고쳐지지 않네요’ 하고 돌려보낼 수 없죠.”
그의 가게에는 요즘도 10년 넘은 VCR, 오디오, 캠코더 같은 물건이 종종 들어온다. 젊은 세대에겐 낯선 기기지만, 어르신들에겐 여전히 소중한 물건이다. 그는 그런 사람들의 사연을 듣고, 정성껏 수리를 해준다. 때로는 수리비를 받지 않기도 한다. “할머니가 오셔서 돌아가신 남편이 쓰던 라디오라고 하시더라고요. 그런 건 돈 받고 고치고 싶지 않죠.”
기술보다 중요한 건 '지속하는 힘'
40년이라는 시간 동안 세운상가도 많이 변했다. 같은 층에서 일하던 동료 가게들은 하나둘 문을 닫았고, 젊은 사장들로 세대교체가 이루어지는 중이다. 하지만 김 사장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다.
“내가 할 수 있는 걸 하면서, 그걸 꾸준히 한다는 게 쉽지 않아요. 근데 그게 진짜 실력이라고 생각해요. 기술은 누구나 배울 수 있지만, 꾸준함은 마음에서 나오는 거거든요.”
그는 지금도 매일 아침 9시가 되면 정해진 시간에 셔터를 연다. 가게 안으로 들어오면 제일 먼저 어제 맡긴 제품을 꺼내 상태를 점검하고, 수리 도구들이 놓인 작업대를 깨끗이 정리한 뒤 하루를 시작한다. 작업대 위에는 낡은 납땜기, 아날로그 테스트기, 수공구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다. 그중엔 30년 넘게 사용한 도구들도 있다.
“도구는 오래될수록 손에 익어요. 이 납땜기는 한 번도 고장 난 적 없어요. 고장 나면 제가 고치면 되니까요.” 그는 자신만의 리듬으로 하루를 운영하며, 이 공간을 단순한 가게가 아닌 '작은 공방'처럼 느껴지게 한다.
젊은 세대에게 전하는 메시지
최근엔 유튜브와 블로그를 보고 일부러 찾아오는 젊은 고객도 늘었다. 김 사장은 이 흐름을 반갑게 여긴다. “요즘 애들은 다 새 거 사잖아요. 근데 고치는 맛을 알면 못 떠나요. 무언가를 살리는 경험은 ‘물건의 가치’보다 더 깊은 걸 느끼게 해 줘요.”
그는 기술을 배우고 싶다는 청년들에게도 시간을 내준다. “그냥 손재주 있다고 되는 게 아니에요. 일단 기본기는 책으로 배우고, 손은 시간으로 단련해야 하죠. 내가 쌓은 경험을 누군가 이어간다면 그것만으로도 고맙죠.”
세운상가의 변화 속에서도 남는 가치
세운상가는 한때 수천 명의 전자기술자들이 드나들던 곳이었다. 지금은 그 숫자가 훨씬 줄었지만, 새로운 세대의 창업자들이 하나둘 이곳에 둥지를 틀고 있다. 김 사장은 그들을 보며 응원의 눈빛을 보낸다. “새로운 기술도 좋지만, 오래된 기술이 가진 깊이도 알았으면 좋겠어요. 지금 이곳은 세대가 만나는 장소가 됐죠.”
그는 세운상가가 단지 ‘낡은 곳’으로 기억되지 않길 바란다. “여긴 사람 냄새나는 기술자들의 공간이에요. 언젠가 사라질지도 모르지만, 기록으로라도 남아야 해요.”
소상공인, 도시를 지키는 조용한 존재
김영수 사장님의 수리점은 단순한 가게가 아니다. 그 공간은 기계가 고쳐지는 곳인 동시에, 추억이 되살아나는 장소다. 전자제품이라는 물건을 넘어, 그 안에 담긴 사람들의 이야기와 감정이 살아 숨 쉰다.
이처럼 지역 소상공인들은 단순히 ‘장사’를 하는 사람들이 아니다. 그들은 골목의 역사이고, 도심의 문화이며, 사람들의 기억을 지키는 살아 있는 기록자다. 김영수 사장님과 같은 사람들이 오늘도 묵묵히 자리를 지키고 있기에, 우리 일상은 더 따뜻하고, 더 사람답다.
✔️ 블로그 글 요약
- 세운상가에서 40년을 이어온 수리 장인의 이야기
- 기술보다 ‘지속’과 ‘마음’이 중요하다는 철학
- 고객의 사연을 기억하고 정성으로 대하는 자세
- 젊은 세대에게 기술을 전수하고픈 마음
- 도시 안의 소상공인이 가진 문화적 가치